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부드러운 피리소리와 섞여 분수대를 따라 흘러내렸다. 남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제 눈 앞의 대성당을 올려다보았다.
성당 안쪽, 저 멀리에 놓인 거대하고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상은 누가 보기에도 경건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이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후."

운명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무녀. 기사. 영주와 병사들. 그리고 자신. 그들이, 우리가 흘렸던 피와 눈물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이델은 또다시 드는 상념에 가볍게 인상을 찌뿌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도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듯 했다. 이미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으면서 자신은 무얼 바라고 여기에 온걸까.
기사 두엇이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쳐지나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보면 웃으며 가벼운 인사 몇마디를 건네던 사람들이었다.

"...이델?"
"......?"

이곳에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이상......아. 단 한명 있기는 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이델도 잘 아는 얼굴이 서있었다. 그의 친형이자 로체스트의 기사인 레덴이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저번 편지에선 콜헨쪽으로 가볼생각이라더니. 여긴 어쩐일이야?"
"...뭐. 어쩌다보니."

오랜만이라... 이델은 보름 전 쯤 형과 만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기억할리가 없나. 가만히 이델의 표정을 살피던 레덴이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제 왼쪽으로 슬쩍 고갯짓을 해보였다.

"시간 괜찮다면 술 한잔 하러 갈래, 이델? 괜찮은 주점이 있는데."


******


주점에 와서 술과 안주를 주문한 후, 레덴은 이것저것 자신의 일상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레덴이 이델에게 몇번쯤 지금은 무얼 하고있는지, 여긴 무슨일로 온건지 등을 물었지만 이델은 그저 그냥 일을 하고있다, 볼 일이 좀 있어서, 등 애매한 답을 하고는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레덴이 제 잔에 술을 따르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힘든 일 있어, 이델? 표정이 말이 아닌데. 말해줄 생각이 없다면 안해도 되고."

이델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가만히 빈 잔을 노려보았다. 잠시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꾹 다물고는 가만히 레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고싶었지만 어디까지 말해야할지,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해받긴 힘들겠지만. 이델은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 ...형은 만약에 형이 고생해서 모두를 구했는데 아무도 기억을 못하면 어떨것같아?"
"?"
"그러니까... 뭐, 공로를 알아주지 않는다 이런정도가 아니라. 형이 모두를 구한 일때문에 모두에게서 형이 한 일이나. 형 자신까지 잊혀진다면."
"...글쎄다, 많이 힘들겠지."

그러네, 힘들겠지. 당연히. 이델은 픽 웃고는 빈 잔을 다시 채우려 술병을 들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간략하게 형에게 말해서 뭐하자는건지. 아무래도 자신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레덴은 제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고있었다. 이델은 실없는 소리를 이렇게나 진지하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의미는 잘 알 수 없었지만, 대강 은유적인 이야기로 해석했을때 저런 상황을 겪었다면. 레덴은 이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들어 자신이 따라주면서 말을 이었다.

"-고생 많았다. 넌 정말 최선을 다 했을거야. 모두를 구했는데 누구도 알아주지않는다면 정말 힘들겠지. 고생했어, 이델."

이델은 멈칫한채로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레덴을 바라보았다. 형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앞으로도 누구도 그 성과, 그들의 의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겠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것도 없고. 그래도. 형의 고생했다는 한마디에 속에 있던 무언가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울컥하는 기분에 이델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잔을 받아마셨다.
그날 이후 계속 자신의 등뒤를 따라다녔던 드래곤들의 울음소리와, 마족들의 모습과, 잊혀진 그들의 피내음이 조금은 사그라든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내가아, 그래서 막... 드ㄹ...도 막... 잡고... 카단.... 어? 막... 놀에... 설...이..ㄴ..."
"큭, 푸흡... 그..그래, 아이고 장하다, 내 동생."
"어?? 잉켈ㅅ... 님도... 최고 기사.... 내가... 형이... 얼마나... 기뻐ㅎ...."

웅얼거리던 이델은 결국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인채 조용해졌다. 레덴은 그제야 소리내어 큭큭거리면서 탁자에서 컵과 접시들을 이델쪽에서 치웠다. 제 동생이 이만큼이나 풀어진채 술에 취한 모습은 꽤나 신선한 상황이었다. 제 주량이나 최소한의 제정신만은 칼같이 지키던 녀석이었는데. ...그만큼이나 힘들었던 뭔가가 있었다는거겠지. 하소연하던것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큰 일이.

"이델과 술을 같이 먹은게 얼마만이지. 이 녀석 술버릇이 이런거였나? ...최고기사라니, 기사가 되고싶던거였나, 역시."

레덴은 이델을 주점에서 부축해서 나왔다. 처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기사 기숙사를 향해 걸었지만,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었다. 기사 기숙사는 일반인 출입금지. 기사가 아닌 이델은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다. 왜 이델을 기숙사로 데려가면 된다고 생각했던건지 알수없는 노릇이었다.
레덴은 한참 고민하다가, 이델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콜헨쪽으로도 한번 가보겠다고 했었나. 여긴 여관이 따로 없으니 분명 콜헨에서 생활하고 있었겠지? 아니더라도 여관이 있으니 하루정도 머무는건 충분할거고.
레덴은 마부를 찾아 돈을 쥐어주고는 이델을 콜헨까지 태워주고, 추가로 여관까지 부축해달라는 부탁을 더했다. 다그닥거리며 콜헨으로 출발하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덴은 어깨를 으쓱하고 등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었기에 처음 봤을땐 변했나 했지만, 역시 이델은 자신의 동생이었다.


******


잠에서 깬 이델은 멍하니 눈을 감은채 끙끙대며 누워있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속도 울렁거렸다. 밖에서 익숙한 개짖는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에 위화감을 느끼고 눈을 떠보니 매우 익숙한 콜헨의 여관방이었다. 이델은 깜짝놀라 주위를 다시 휘휘 둘러보았다. 자신은 겉옷과 신발정도만을 벗은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마지막으로 기억나는게... 이델은 인상을 찌뿌렸다. ...술마시고 레덴에게 드래곤을 잡았다느니, 최고기사가 되어서 형이 정말 기뻐했었다느니 하는 말들을 지껄였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형 반응이 어땠더라? 점점 떠오르는 다른 기억들에 이델은 한참을 마른세수를 했다. 술먹고 이런 추태라니, 형이 술주정정도로 생각했기에 망정이지.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똑똑, 하고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일어났냐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관 주인인 에른와스씨였다. 예, 하고 대답을 하자 에른와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그릇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술에 잔뜩 취한 르네이델님을 마부가 부축해 데려오더군요. 숙취에 효과가 좋은 버섯죽입니다."
"...감사합니다."
"요며칠간 보이지 않으시고 용병단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가 있길래 그대로 떠나신게 아닌가 했습니다만... 다시 돌아오신건가요?"
"아니... 어딘가에 소속되는건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이곳에도..."

이델은 입을 다물었다. 숙취인지 다른 이유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 레덴에게 그런 위로를 들어서 조금 나아진 것 같긴 했지만 콜헨에 돌아오니 다시 이런저런 생각이 나는듯 했다. ...이곳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이델은 정중히 버섯죽을 사양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관 숙박비를 건넸다. 로체스트로 돌아가던, 다른 마을로 가던, 어쨌든 이 마을에는 더 이상 있고싶지 않았다.
누가 보기에도 서둘러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보였기에, 에른와스는 조금 더 쉬었다 가라는 등의 만류는 일절 하지 않은채 그저 쓴 미소지으며 배웅할 뿐이었다.

"가시는군요. 르네이델님의 앞길에도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델은 여관을 나와 잠깐 용병단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련없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 마을 입구로 향했다. 입구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에서, 마침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던 이와 마주친것은 그때였다.

"어머."
"....실례."
"잠깐, 당신. 이름이 르네이델이라고 했던가요? 저번에 내게 황금색 놀가죽을 가져다준건 고마웠어요."

이델은 고개만 끄덕여 감사를 받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가려 했지만, 아네스트는 할 말이 더 남았는지 이델의 앞을 제 몸으로 가로막았다.

"기다려봐요. 당신, 용병일을 그만뒀다고 들었는데. 혹시 트레저헌터가 되어보는건 어때요?"
"괜찮습니다."
"어머... 그렇게까지 칼같이 거절할줄이야. 아쉽게 됐네. 그럼 이제 고향으로라도 돌아가는건가요? 아니면 다른 용병단으로? 당신같은 실력이라면 어디서든 환영할텐데."
"개인 용병으로 일할겁니다."

이델은 슬슬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아네스트는 이델의 행동을 보고는 피곤한 사람을 너무 붙잡아세워서 미안해요, 하고 덧붙이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미안하다면 그냥 보내주었으면 하는데. 하지만 아네스트는 한쪽 팔을 골목 벽에 댄 채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는 보내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표시를 확실히 하고있었다.
잠깐 듣고, 또 관심없는 이야기라면 거절하면 되겠지. 이델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혹시 별다른 의뢰라도 맡은게 있어요?"
"없습니다만, 무슨일로..?"
"어머, 잘됐네요. 모르반에 있는 트레저헌터 길드에 전해줄 중요한 편지가 있는데, 돈은 충분히 쳐줄테니 당신이 좀 전해줄래요? 이왕이면 가서 트레저헌터가 되어볼까 한번 생각해보는것도 좋고."

...모르반이라.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 의뢰였다. 이델은 의뢰를 승락하고 약간의 보수와 편지를 받아들었다. 이곳도 싫고, 로체스트도 그다지 가고싶지 않으니 어쩌면 전혀 다른 지역에 가있는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숙취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계속해서 지끈거리는 머리도 그나마 나아질수 있을지도 모르고.


******


"도착했습니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욱......"

이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에서 서둘러 내렸다. 평소라면 배를 타는것정도는 별일이 아니었을텐데, 숙취로 안그래도 속이 좋지 못한 상태였어서인지 금방이라도 올라올듯이 속이 울렁거려 잠시동안 멈춰선채 쉬어야 했다. 버섯죽정도는 감사히 받아 먹고 어느정도 숙취를 해결할걸 그랬나. 이델은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사공에게 괜찮다는 의사표시를 하고는 트레저헌터 길드의 위치를 물었다.
트레저헌터길드는 용병단 건물과 달리 좀더 가벼운 느낌의 나무건물이었다. 바닷가를 바로 앞에 두어서인지 바다내음이 가득했고, 마을 내에 위치해있던 용병단과 달리 주위를 둘러봐도 건물하나 없었다. 언덕으로 향하는 길이 있는것으로 보아 마을은 좀 더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듯 했다. 이델이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 안에서 소리라도 지르는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이델은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문을 열자마자 이델이 마주친 것은 새하얀 무언가였다. 말그대로 새하얀데다-위는 약간 분홍빛이 돌았지만- 두개의 쫑긋한 귀같은것까지 있어서 잠시 이게 대체 뭔가, 하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평범하게 새하얀 망토를 두른 소녀였다. 귀 또한 머리띠에 달려있는 토끼귀모양 장식인듯 했고, 등에는 길고 흰 스태프같은 것도 매고있는걸로 보아 마법사인것 같았다. 소녀는 제 앞의 젊은 청년과 시끄럽게 말다툼중이었는데, 양쪽 다 목소리가 꽤나 커서 이델은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두통이 더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던 여성은 난처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델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난 모른다고!"
"왜 모르는데!"
"아, 어서오세요, 트레저헌터 길드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무슨일로 오셨나요?"
"애초에 넌 누군데! 그 여관도 언제부터 비어있던건데, 말이 하나도 안되잖아!"
"아히르는 바보야!! 어떻게 날 잊어버릴수있어?! 맨날 밀레드랑도 같이 놀았으면서..!!"
"...콜헨의 아네스트로부터, 이곳 길드장에게 편지를 전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아, 진짜! 걔도 모른다니까! 너 아까 마을 돌아다니면서 다 물어보고다녔다며! 그런 사람 없어, 없다고!"
"길드장님은 지금 안계신데... 편지는 제가 대신 전해드릴게요. 이리 주세요."
"있었단말야!!! 있었다구!!!!"

무슨 일인진 몰라도 둘 다 정말로 시끄럽군. 이델이 편지를 전해주다가 두사람쪽을 힐끔 바라보며 인상을 찌뿌렸고, 여성은 한숨을 쉬었다.

"아, 죄송해요... 조금전에 갑자기 나타난 아이인데, 자꾸 길드에 와서는 무슨 이름들을 대면서 자기랑 이사람들을 모르냐고 묻더라구요. 분명 모르반에는 없는 사람이라고했더니 자꾸..."
"......"
"아히르도, 에실트도 다 바보야!! 흐엉... 세르하도 다 기억 안난다고 하고... 어떻게 나랑 에이레랑 밀레드랑 그렇게 친하게 지냈으면서 다 잊어버릴수있어...? 다 미워! 멍청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녀가 뛰쳐나가자 청년은 별 이상한 자식 다보겠다며 인상을 찌뿌렸고, 여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이델은 소녀의 마지막 말들이 신경쓰였다. 세르하. 선택받은 무녀였던, 자신이 구해줬었던 무녀와 이름이 같았고. -이름정도야 동명이인이라고 치더라도, 누군가들에 대해 다른이들이 존재까지 잊어버렸다는 상황. 이델은 그럼, 하는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길드건물을 나왔다. 왠지 소녀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

소녀가 어디까지 뛰어갔을지 걱정했던것도 잠시,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이델은 소녀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옷이 죄다 새하얗고, 토끼귀까지 달고있어 눈에 안띌수가 없었다. 소녀는 선착장 근처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저기."
"......"
"그, 잠시. 묻고싶은게."
"....으응?"

고개를 든 소녀와 눈을 마주친 이델은 흠칫했다.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것처럼 훌쩍이고있었다. 울면 달래야겠지. ....어떻게 달래야하지? 이런저런 난감한 상황들이 떠올라 이델은 우선 근처의 캠프파이어를 가리켰다. 일단은 이런곳 말고 저쪽에 가서 앉는게. 소녀는 바닥에 끌려 모래가 잔뜩 묻은 제 망토자락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훌쩍..."
"......"

일단 앉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델은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통성명부터 하는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나는 르네이델이다."
"네에..."

그리고 둘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기를 기다리던 이델은 소녀가 더 말을 잇지 않고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있는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 아인 나와 그다지 대화할 생각도 없어보이는데, 숙취와 배멀미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내가 괜한 짓을 한건 아닐까. 사실 별 이야기가 아닐수도 있고. 눈을 깜빡이던 소녀가 문득 급히 소리쳤다.

"아, 맞다! 제 이름은 아리에리라고 하고... 어...... 스무살이구... 어... 원래는 트레저헌터였는데... 아니, 어... 견습...? 아니, 그치만 정식으로 넣어주겠다고 했었는데... 밀레드랑.... 둘다... 힝.... 밀레드으........"

이것저것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묻지 않은 것까지 조잘거리던 아리가 문득 '밀레드'라는 이름을 꺼내더니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정신없는 아이로군. 이델은 그 '밀레드'라는 이름이 아까의 말싸움에서도 나왔던, 다른 이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진 자의 이름이라는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그에 대해 물었다.

"아까 트레저헌터 길드에서 네가... 그, 밀레드라는 이와 누군가를 그들이 잊어버렸다며 화를 내던데. 혹시 그 이야기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들려줄 수 있나? ...싫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자세하지 않더라도 상관없고."

아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금세 다시 훌쩍이더니, 제 양손으로 무릎을 꼭 쥔채 입을 열었다.

"...전에 여기 트레저헌터하러 왔을때요.... 밀레드랑.... 에이레언니랑 저어기 있는 여관에 있었는데요... 훌쩍, 막.... 같이 임무같은것도 하고... 흑, 친구도... 사귀고.... 다들 친했는데... 밀레드도 죽었다가 살았고... 에이레언니도 죽, 윽, 죽... 죽어서... 흐윽.... 왔는데.... 헝... 다들 밀레드도 까먹고... 에이레, 언니랑... 저도, 다, 잊어.... 으, 흐으..... 흐엉......"

죽음 후에 잊혀졌다니, 이 소녀의 동료들도 에린의 영향으로 인해 사라진 이들인 듯 했다. ...오르텔성의 그들처럼. 물기어린 목소리로 간신히 설명을 이어나가던 아리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소리죽여 울고있는 아리를 보고 이델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가만히 있었다. 자신은 원래 우는 사람을 달래는 재주가 없는데, 심지어 우는 상대는 오늘 처음보는 소녀였다. 이런때에 자신이 아닌 레덴이 있었다면 훨씬 자연스럽게 달래줬을텐데. 레덴이라면-
문득 이델의 머리속에 어제 레덴이 해줬던 위로들이 스쳐지나갔다. 이 아이가 그걸로 울음을 그칠까.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까. 아리가 우는 모습 너머로 얼마전 자신이 절망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함께했던 동료가 죽음으로 인해 다른 동료로부터 잊혀지는건. 그들의 목숨을 건 의지조차 무의미해지는 그 상황은. 그 모든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기분은. 이델은 아리의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천천히 말을 건넸다.

"-고생 많았다."
"......"

아리는 울던것도 멈춘채 눈을 크게 뜨고는 이델을 가만히 바라보고있었다. 이델은 어제 레덴이 했던 위로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최선을 다 했을거다. 동료가 죽고, 존재조차 다른 동료들에게 잊혀진다면 정말로 힘들었겠지. 고생했다, ...아리에리."
"......"
"......다른이들은 잊었지만. 그래도 네가 기억하고 있잖나. 네가 잊어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어. 그들은, 죽은 이들은. 그들이 이곳에서 울고 웃고 살았음을 기억해주고...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그들이 다른이들로부터 잊혀졌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할거다."

이델은 말을 끝내고 입을 다물었다. 뒤의 말은 저도 모르게 나온 말들이라, 사실 눈앞의 소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말같았다. 그들은 죽고 잊혀졌지만 네가 있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할거라고. 잉켈스님이, 오르텔성의 그들이. 모두가 죽고 잊혀지고 그들의 의지마저도 잊혀졌지만. 적어도 한명이라도 기억하지 않느냐고.
아리는 여전히 이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눈물 한방울이 주륵 흐르더니, 아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더 많이. 눈앞에 오늘 처음 본 이가 앉아있다는 사실도 신경쓰지 않은채 아리는 목놓아 울고, 또 울었다. 위로가 조금은 되었을까. 이델은 그저 아리가 눈물을 다 흘려보낼때까지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


"고마워요!"

한참을 목놓아 운 끝에, 아리는 약간 쉰 목소리와 새빨개진 눈을 한채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흰토끼같군. 토끼귀에, 흰 옷에. 눈도 빨갛고. 이델은 의미없는 생각을 잠시 하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감사를 받을만한 정도는 아니다."
"헤헤, 그치만 덕분에 생각났는걸요! 언니는 죽었지만 밀레드도 아직 살아있고... 다들 까먹었지만... 으음... 아히르는 원래 바보고... 힝... 그치만 에실트는 똑똑한데... 나중에는 기억할지도 몰라요!"
"......그랬으면 좋겠군."
"...그래도 음. 여기있으면 자꾸 밀레드랑 에이레언니 생각이 날테니까... 음... 으으음...... 콜헨으로 돌아갈까..."
"콜헨?"
"네! 거기 강아지랑 고양이들이 무지무지 귀여워요! 그리고그리고~ 아네스트라고 이쁜 언니가 있는데 여기 추천해줬어요! 그리고~"

아리는 어느새 콜헨에 대해 자신이 기억하고있는 것을 이것저것 조잘거리고있었다. 온천이 따뜻했다느니, 닭이 귀여웠다느니, 음식이 맛있었다느니. 콜헨에 대해 꽤 좋은 기억들을 가지고있는걸 보니 가서 잘 지내겠군, 하고 이델은 생각했다.

"응, 결정! 일단은 콜헨으로 가야지! 헤헤, 아저씨는요?? 아저씨도 트레저헌터에요??"
"........................아니, 개인용병이다. 이곳엔 편지를 전하러 온것뿐이고. 이곳에서 조금있다가 아마 로체스트로 갈거다."
"으응... 그럼그럼~ 저기 위에 여관이 무지 편하고 좋아요! 며칠전까지 에이레언니가 잘 청소해놔서 무지 깨끗하고... 그리고 촌장할아버지도 무지 친절해요! 샬롯도 귀엽고! 저기 위에는 전망대가 있는데, 거기서 보면 모르반이 다 보여! 바다랑 무지무지 이쁘니까 꼭 가봐요, 알았죠?"
"그래."
"그럼 전 가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 아저씨!"
"...아저씨가 아니라 르네이델이다."
"네, 르네이델아저씨!"
"......"
"...르네아저씨? 르델아저씨?? 이델..??"
"...아니, 아니. 미안하다. 그만 가봐라."
"네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아리는 선착장으로 뛰어가 사공과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숙취에 배멀미에, 이제는 아리와의 대화로 더 정신이 없어진 이델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숙인채 이마를 짚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머리는 아프고. 여기서 대체 뭘 하고있는건지. 아이가 기운이 생긴건 당연히 좋은 일이긴 하지만.

"-아저씨!"

이델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눈 앞으로 다가온 아리가 배시시 웃었다. 아리는 손에 들고있던 웬 수통과 사탕들을 이델의 양손 위에 탈탈 털었다.

"사공아저씨가 그러는데요, 아저씨 지금 막 배멀미랑 그래서 막 속에서 우에엑~ 하고있는거라고 하더라구요! 이거 배멀미에 좋은거래요. 아저씨가 손님들한테 가끔 파는건데 아까는 하나도 없어서 못팔았다고, 방금 잡화점가서 사왔대요! 이거랑... 이거는 사탕인데 고맙다는 의미에서 선물! 저 좋아하는거에요! 많이많이 먹어요, 그럼 안녕!"

이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아리는 서둘러 배를 향해 달려갔다. 이델은 제 손에 놓인 수통과 사탕들을 내려보다가, 어느새 출발한 배를 바라보다가, 다시 제 손을 내려보다가, 문득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대체 뭐하는 아이였던건지. 결국 자신이 궁금했던것처럼 에린과 관련이 있는 일은 아니었던듯 했지만, 그래도 시간낭비를 했다는 생각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이델은 배멀미에 좋다는 음료를 마셨다. 두통이 조금 가라앉은 듯 했다. 빨간색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어보았다. 달달한 냄새부터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딸기맛이 가득한 단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완전히 어린아이로군. 나머지 사탕은 적당히 주머니에 넣고, 이델은 사탕을 씹어 삼키고는 음료를 다시 들이켰다.
그런 아이가 동료를 잃고, 다들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마치 자신이 그곳에서 돌아온 후 겪었던 기분처럼.

...잠깐.

그 아이는 어떻게 죽은 동료를 기억하고 있었던거지? 이델은 그제야 드는 생각에 음료를 마시던 손을 멈췄다. 자신처럼 에린의 영향을 받았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곳에 있던 이는 자신과 그녀 뿐이었는데. 기억하는 이들도 일부는 있는건가? 마법사였던 것 같은데, 그때문에 영향을 덜 받은건가? 혹 아니면. 다른 이유가?
이델은 언젠가 한번, 가능하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콜헨에 들러 소녀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후 트리스탄으로부터의 로체스트로의 의뢰와, 로체스트에서의 이런저런 갑작스런 의뢰, 혹은 부탁들로 인해 이델이 아리를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로체스트 습격사건 이후, 고양이귀의 '마녀'와 콜헨에 가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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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리(아리에리)

-나이 : 20세

-성별 : 여자

-키 : 165cm

-직업 : 트레저헌터 신입->키블 길드원

-외모 : 머리색은 밝은 분홍색. 앞머리가 있고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다. 머릿결이 그다지 좋지는 못해 약간 부스스한 인상도 줌. 눈동자는 자주색. 항상 흰 토끼귀를 쓰고 다닌다.

-성격 : 철이 덜 든 어린아이같은 느낌. 대부분이 웃는 표정으로 순수하고 대부분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의외로 멘탈이 짱짱하다.
호불호는 의외로 확실한 편인데,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자신의 감을 믿고 움직인다.
하나에 생각이 꽂히면 다른곳에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아서 실수가 잦은 편. 눈치가 꽤 없다.
감정표현이 확실해서 얼굴만 봐도 지금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있음. 뭔가를 봤을때 반응이 매우 크고 거짓말을 아주 못한다.
사람을 볼때는 긍정적인 면부터 보고, 본인이 사기를 당해도 상대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생각하곤 함. 그래도 요새는 세상의 쓴맛을 조금 깨닫고 처음 봤을때 감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가가지 않으려 한다.
실생활에서 거의 숨쉬듯 마법을 자주 사용하지만 정작 사람에게 공격마법을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 상대가 진짜 적이라고 생각될때만 마법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스태프로 후드려 팸.

-좋아하는것 : 테일, 이델, 키블, 귀여운것, 신기한것, 맛있는것. 외에도 매우 많음.

-싫어하는것 : 자신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것. 징그러운 것.

-특이사항 : 체력이 제일 약한 대신 마법으로 보정한다. 매일 신고다니는 하이힐도 마나앰버를 응용한 마법을 걸어둬서 아무리 뛰고 점프하고 굴러도 발을 삐끗하지 않음.
'너만이 할수있다'던가 '네 능력은 대단해'같은 칭찬을 아주 좋아한다.
본인이 에이렝때에 결국에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기때문에 전에는 어려운 이들을 별 생각없이 도와줬다면 시즌3이후에는 약간의 죄책감도 있다.
들고다니는 스태프는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만들었는데 최근 깨먹었다가 복구에 성공했다. 깨먹었을때 대판 울었음. 그래서 스태프에 누군가 손대려 하면 일단 경계부터 한다.

-과거 : 꽤 부유한 집안에서 바르게 자람. 마법에 꽤 재능이 있어 어느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웠는데, 그 후 그의 도움으로 어느 왕국 마법사의 제자의 제자자리로 추천을 받아 추천장을 들고 홀로 여행을 시작함. 부모님은 세상물정에 어두운 아리가 그나마 도착할 장소와 지도가 있다면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넓은 세상을 처음 본 아리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추천장과 지도조차 잊어버림. 그 후 이렇게된거 여행이나 다닐까! 하고 본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린채 이리저리 돌아다님.
콜헨에 도착한 후 칼브람 용병단에 들까 했지만 그즈음 아네스트로부터 모르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모르반에 놀러감.(구경할곳이 더 많아보여서) 밀레드와 친해지고 나서 이런저런 사건을 겪고, 에이랭 후 현타를 겪다가 이델과 우연히 만나 정신적 도움을 받은 후 콜헨으로 돌아왔다. 로체스트와 콜헨을 오가며 이런저런 의뢰를 받다가 테일의 제안으로 키블에 입단함. 현재 부모님께 꼬박꼬박 편지와 약간의 돈을 보내고있고, 부모님은 아리가 왕국 마법사의 제자의 제자일을 하고있다고 오해를 하고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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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트리야. 너희한테도 연락했으면 좋았겠지만, 새로 만든 너희 아지트는 마을 밖에 있으니까..."
"트리? 그게 뭐야??"
"아리는 트리가 뭔지 몰라?"
"응! 우리 고향엔 저런거 없었는데. 처음봐!"
"그래? 트리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장식품이야. 위에 별도 달고, 리본이나 저런 공이나. 여러가지로 장식하는거지."

아리는 눈을 빛냈다. 테일이나 이델이 곁에 있었다면 보나마나 지금 생각하고 있는게 뭐든 관두라고 말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리 뿐이었다.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던 아리는 이내 고마워, 케아라! 하고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그날, 아리가 아지트에 도착한것은 저녁시간을 훨씬 넘어 밤이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다녀왔어! 하고 아리가 기운좋게 외치자 바로 테일의 반응이 이어졌다.

"늦었잖아, 멍청아! 너 저녁 없다."
"엩. 내 저녁!!!"
"굶어."

아리가 울먹이자 탁자에 앉아 제 무기를 점검하고있던 이델이 부엌쪽을 눈짓해보였다.

"따로 챙겨뒀으니 걱정마라. 그보다 이 시간까지 밖에 있었으면서 저녁도 안먹고 들어온건가."
"응! ...아, 맞다! 이거 봐, 다들!"

아리는 박수를 쳐 시선을 모으더니 아지트 밖에서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정확히는 마법을 사용해 띄워 가져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것은 아지트의 천장에 닿을 듯 말듯 한, 커다란 트리 용 나무였다. 테일과 이델은 황망한 시선으로 트리를 보다가, 서로를 돌아보고는 다시 아리쪽을 보았다.

"이거 봐! 이게 트리라는 건데, 크리스마스에-"
".......??? 너 그건 대체 어디서. 아니 왜. 아니. 그래. 저 놈을 이해하려고 한 내가 바보지."
"-장식을 막 여기에 꾸미고, 별도 반짝반짝!-"
"그래서 저걸 우리가 꾸미자는건가."
"응! 그러려고 사왔어! 잡화점에 갔는데 아엘언니가 안판다길래. 로체스트에 가면 있을거래서 잠깐 다녀왔어!"
"이건 대체 무슨 멍청이지. 너 시간하고 돈이 남아도냐? 그거 살 돈이 있으면 아직 덜 갚은 아지트 구매비나 변상해."
"-그러니까 셋이 같이 꾸미면 완전 재미있을거야!"
"이델. 저 자식 내 말 하나도 안듣고있지. 썰어버려도 되지."
"참아라."

낫으로 손을 뻗으려는 테일을 간신히 만류하고, 이델은 아리쪽을 돌아보았다. 아리는 이미 아지트의 한 구석, 벽난로 근처에 트리를 옮겨두고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위치를 잡았는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장식물은 내일 사오려고 하는건가."
"응?"
"트리를 꾸밀 장식물 말이다. 별이라던가, 전구라던가."
"아, 그거 말인데 직접 만들려고! 트리가 무지무지 비싸서 돈이 없었어!"
"..........그러니까 지금. 가진 돈을 전부 트리를 사는데 써버렸다는."
"??? 응!"

이델은 대답 대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옆의 테일이 저벅저벅 걸어가 아리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고, 왜.. 왜 때려?! 하는 아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이델에게는 테일이 겨우 한대만 쥐어박은것도 용케 참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잠시후 키블 내에서는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 주제는 당연히 저 트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리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꾸ㅁ..."

말을 이어나가던 아리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털썩 쓰러지고, 순식간에 아리의 뒷목을 내려친 테일이 한숨을 쉬며 이델을 돌아봤다.

"이 자식이 자꾸 말하게 두면 진짜 썰어버릴 것 같아서."
".....그래."
"하아- 그래서 이 망할 트리를 어떻게 한다."

테일은 트리를 힐끔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저 멍청이가 하필 작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커다란 트리를 사와서는. 꾸미지 않고 그냥 두기에는 보기에 좋지 않고. 버려버릴까. ......버리긴 또.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나가던 테일은 엎드려있는 아리를 힐끔 보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저거 한대만 더 때리면 안되나. 어느새 끓여왔는지, 가만히 차를 마시던 이델이 둘과 트리를 가만히 보다가 의견을 냈다.

"아마 환불해오라고 해도 본인도 죽어도 말을 듣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판매측에서 환불해줄 것같지도 않으니.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적당히 잘라서 땔감으로 쓰고 그 전까지는 트리로 쓰지그래."
"장식은 누가 꾸미고."

이델은 눈짓으로 아리를 가리켰다. 테일은 매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아리가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인상을 찌뿌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으, 머리야... 헉, 나 졸았어..? 나 되게 졸린가봐..!"
"쯧쯧, 저런 쓸데없는데 힘을 낭비해서 그래."
"쓸데없는데 아니거든!"
"트리 얘긴 결론 났어. 크리스마스까진 둔다. 장식은 네가 구해다 꾸민다. 크리스마스 지나면 땔감으로 쓴다. 이상."
"!!!!! 진짜?? 우리 같이 트리 막 꾸미고 하는거야?? 고마워, 테일아!!!"
"아니, 너 혼자 꾸민다고."
"이델도! 진짜진짜 고마워!!!!"
"이델. 저자식 또 내 말 하나도 안듣고있지. 역시 썰어버리는게 좋을까."
"참아라."
"와아!!!"



다음날부터 트리에 이런저런 장식들이 달릴거라는 이델의 예상과 달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트리는 여전히 장식 하나 없는 일반 나무였다. 아리는 매일같이 또 부탁을 들어주러 사방팔방을 돌아다녔고. 테일은 트리에는 관심을 끄고 언제나처럼 돈되는 의뢰를 찾아다녔다. 며칠이 지난 아침, 신경이 쓰인 이델이 참다 못해 나가려는 아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리. 그래서 트리는 대체 언제 꾸밀건가?"
"응? 아, 오늘은 안돼! 리엘 할아버지가 얼음딸기주를 가져다 달래서- 딸기주 구하러 던전 가야돼! 나중에!"
"...아니, 크리스마스가 이틀 뒤다만."
"헉..!! 그러네, 서둘러야겠어!"

말을 마친 아리는 이델이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휭하니 달려가버리고는, 그날도 저녁을 먹곤 늦게 들어와 바로 자러 들어가버려 결국 트리는 휑한 채 그대로였다. 이델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트리같은 걸 꾸미는건 전혀 제 취향도 아니었고 충분히 아리가 할 수 있는 일일테니 도울 필요도 없겠지만.
다음날 오전, 이델은 잡화점에 들렀다.

"안녕, 무슨일이야?"
"트리를 꾸밀 장식을 사러왔는데. 부담스럽지 않은걸로."
"트리? 요새 트리 장식 찾는 사람이 많네. 역시 크리스마스라 그런가?"

아일리에는 가게 한켠에 놓인 장식이 든 상자를 보여주었다. 무난한 리본과 공, 별장식, 양말장식 등 다양한 종류가 들어있었다. 장식 자체의 양이나 질은 나쁘진 않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아일리에가 가격을 말하자, 이델은 인상을 조금 찌뿌렸다.

"가격이 과한데."
"이정도 양에 이정도 가격이면 적당하지, 뭘. 당신들은 하나같이 왜 그렇게 비싸다고 하는건질 모르겠단말야."
"아무리 그래도. ...잠깐, 당신들?"
"왜, 당신 길드의 두 아가씨들 말야. 그 좀 평판 험한 애랑. 맨날 이것저것 부탁 잘 들어주는 애. 둘다 그저께랑 그그저께에 하나씩 와서는 장식값을 묻던걸. 하나는 가격 듣더니 미쳤다고 그 돈을 내냐고 질색하면서 돌아갔고. 다른 하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돌아갔는데. 그러고보니 왜 셋이 같이 안오고 하루씩 따로 와서 묻는거야?"
"그런가."

이델은 장식을 한번 더 보고는, 요즘 유난히 바빠보이던 아리와 평소보다 더 돈되는 의뢰를 찾던 테일을 떠올렸다. 비싸기는 하지만 어느정도라면야 못 낼 가격도 아니고. 셋이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인데, 이정도는. 이델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흠. 다는 곤란하고. 일부만 사는것도 가능하겠지."
"물론이지."
"-히히, 친구야, 뭐 사고있어?"

이델이 괜찮은 장식들을 고르는 사이 다가온 리엘이 이델이 품에 들고있는 상자 속에 고심히 고른 장식들을 구경했다. 와, 트리 장식! 친구야, 트리를 꾸미려는거야?? 언제나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이델을 빤히 바라보던 리엘은 상자에서 장식들을 전부 멋대로 꺼내더니 원래의 상자에 던져넣었다.

"지금 뭐하시는-"
"친구들은 돈 없댔어! 가난해! 히히, 그러니까 필요없는것까지 살 필욘 없어. 아마 안사도 충분할거야!"
"...안사도 충분하다?"

아일리에의 말에 따르자면 먼저 온 둘 다 결국 장식을 사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비싸다고 사지 않은 둘이 로체스트까지 가서 사올리도 없을테고. 리엘이 장난기가 좀 많긴 하지만... 이델의 머릿속에 설마 리엘이 이런 쓸데없는 일에까지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장난을 쳐서 뭔가 득을 얻을 것도 없어보이고. 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알겠습니다."

이델은 그대로 구매하지 않고 아일리에의 아쉬워하는 표정과 리엘의 장난기 어린 손인사를 뒤로 한 채 잡화점을 나왔다. 길드 아지트에 도착해보니 여전히 트리는 휑했고,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사오는게 나았을까. 생각하던 이델은 리엘의 말을 다시 떠올리고는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둘이 돌아오기 전에 뭔가 트리 장식 외의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해볼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깜짝 선물? 그 둘한테 줄만한 게 뭐가 있지? 습관적으로 고민거리가 있을 때마다 차를 끓이러 주방에 들어간 이델은 문득 며칠 전 자신이 팔기위해 낚아온 타티크와 눈이 마주쳤다.

"나쁘진 않군."

생각해보니 자신이 타티크를 낚아온건 수십마리가 되어갔지만, 셋이 먹은건 단 한번, 그것도 타티크를 구매했던 상대가 오랜만에 이런 좋은 품목을 구해 기분이 좋다며 해체해서 팔기 전 세명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을 떼어주었길래 그걸 가져와 요리해 먹은게 전부였다. 그때도 꽤나 맛있어서 좋아했는데. 타티크 한마리의 양이 좀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적당히 포로 썰어서 말리거나 한다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을테고. 이델은 부엌 한 구석의 칼을 들었다.


******


한참이 지나서야 타티크의 해체를 끝낸 이델은 그제야 둘이 오늘 언제 돌아올지를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을 안먹고 와야 할텐데, 슬슬 저녁 시간이라 연락을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요리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 이델은 길드 전용 통신기에 연락을 남겼다.

-이델 : 둘 다 오늘 언제 오나.

조금 후에 먼저 대답이 온것은 테일이었다.

-테일 : 바빠 말걸지마
-이델 : 아주 늦게 오는게 아니라면 저녁은 먹지 말고 들어와라.
-테일 : ㅇ
-이델 : 아리도 이걸 보는대로 연락해라.

"나 왔어어!!!! 그리고 저녁 안먹었어!!"

직후, 밖에서 쾅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생각보다는 이르군. 이델이 고개를 슬며시 내밀어보니 웬 거대한 상자에 뭔가를 잔뜩 담아 둥실둥실 띄워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자 속에 담긴 것은. .....아무리 봐도 폐허에서 자주 보던 항아리와 못먹는 호박들이었다. 이델은 미간을 찌뿌렸다.

"그건 뭐지."
"짜잔! 트리 꾸밀거야! ......헉, 이델 그거야말로 뭐야?! 엄청 커!! 고기야?!"

...저런걸로 트리를 꾸민다고? 의문스러워 하면서도 이델은 타티크, 라고 대답했다. 우와! 타티크!! 아리는 신나하면서 바닥에 상자 속에 든 물건들을 꺼내들었다. 항아리에 호박들. 그리고 에르그 결정이 종류별로 열개 남짓 씩. 에르그 결정이 저렇게나 쌓여있다니, 그가 보면 꽤나 좋아하겠군. 이델은 무심히 그런 생각을 했다.
아리는 항아리를 들고는 집중을 했다. 이델은 저 포즈를 전에 몇번 본 적 있었다. 항아리 등의 잡 물건을 회복용 에르그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쨍, 하는 깨지는듯한 소리와 함께 항아리가 붉은 빛의 하트모양 보석들로 변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뭔가 생각이 있는 듯 하니 알아서 꾸미겠군. 이델은 수고해라, 라는 말을 남기고는 다시 요리를 하러 들어갔다.
아리는 전날의 리엘이 해준 조언을 떠올리고있었다. 트리 장식을 보다가, 가격이 너무 비싸 시무룩 해서는 차라리 에르그 결정으로 꾸미는게 더 반짝이고 이쁘겠다..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이를 들은 리엘이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동의를 해온 것 이다. 그리고는 회복용 에르그가 제일 색도 예쁜 빨강에 하트모양인데 이건 가까이만 가도 생명체에게 흡수되어버리니 꾸미는데 쓰질 못한다고 투덜거리자 리엘이 그럼 흡수가 안되게 하면 되지! 하고는 순식간에 개량된 마법을 내놓았었다.역시 리엘 할아버지는 대단해! 아리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르그 하나를 주워들어보였다.

"으음, 색은 좀 덜이쁜데..."

리엘이 가르쳐준대로 만든 에르그는 회복은 전혀 불가능한 대신 만져도 흡수가 안되는 종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의 기운이 빠져나가니 일반 에르그처럼 팔지는 못하겠지만. 아리는 잡화점에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던 거미줄을 엮어 만든 실로 결정을 하나씩 붙여 트리에 매달았다. 트리는 어느새 은은한 빛을 내는 전구들을 단 것 처럼 스스로 반짝이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아리는 주방에서 점차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델, 트리 다 꾸몄어, 그리고 엄청 맛있는 냄새 난다!!"

아리가 주방 문 앞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구경해보니, 간단한 샐러드와 회 종류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고 스프가 끓고 있었다. 쉴새없이 스프가 타지 않게 불조절을 하며 이델은 다른 고기를 다듬고 있었는데, 모양이나 두께로 봐서는 메인 요리는 스테이크 종류인 듯 했다. 스프의 불을 줄여가던 이델이 맛을 살짝 보고는, 주방 출입 금지라 문밖에서 눈만 반짝이던 아리에게 손짓했다. 아리는 신이 나 달려들어갔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알아, 안다구! 우와! 스프! 나 배고파! 저 토막은 안구워??"

이델은 맛을 보라는 의미에서 아리에게 국자를 내밀었다. 아리는 조금 스프를 떠 마시고는 맛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테일이 아직 언제 온다고 알려주지 않았으니. 늦게온다면 다 식을거다. 어짜피 에피타이저를 먹은 후 메인 요리를 시작할테니 테일이 오자마자 굽기 시작해도 늦지 않아."
"힝, 배고픈데... 테일이는 언제와아.....?"
"저녁을 알아서 먹으란 말이 없었으니, 아마 곧 들어오겠지."

이델은 국자를 든 채 한입만 더.... 하고 빤히 스프를 바라보는 아리의 손에서 국자를 빼앗고 다시 부엌 밖으로 내보냈다. 이내 밖에서는 테일아아아아 빨리 와아아아아.... 하는 앓는 소리같은게 들려왔다. 이델은 못들은 척, 고기를 구워 그릇에 담기만 하면 되게 준비한 후 나머지를 정리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테일아!!! 하는 아리의 반기는 목소리가 들린건 그때였다. 이델이 밖에 나가보니 언제나처럼 피곤함과 돈을 벌었다는 만족감이 섞여 조금은 풀린 표정을 지은 테일이 여어, 하는 짧은 인사를 하고는 의자로 가 털썩 앉았다.

"뭐야,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이델, 오늘 저녁은 뭐야?"
"타티크다."
"타티크?? 저번에 팔았던 사람한테 또 팔았어? 크, 오늘도 오랜만에 진미 맛좀 조금 보려나?"
"아니, 팔지 않고 그냥 조리했다. 오늘은 양이 남아돌테니 먹고싶은 만큼 먹어도 된다."
".......??? 한마리를 다??"
"그래."
"미친."
"빨리 저녁먹자!!! 나 배고파서 당장이라도 죽을거같아아...."
"...좀 기다렸다가 쟤 죽은 다음에 저녁 먹으면 내 양이 좀 더 많아지지 않을까."
"엩."
"농담이야. 먹고싶으면 빨리 가서 이델을 도와서 상을 차리던가?"
"!!! 테일이 똑똑해!"

피식 웃는 테일을 뒤로 하고, 아리는 신이 나 이델을 따라 부엌에 들어갔다. 메인 요리도 완성이 되고, 둘이 에피타이저를 하나씩 들고 나오는데 의자에 앉아있던 테일이 어느새 트리 앞에 서서 뭔가를 하고있었다. 상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이델이 힐끔 보니, 낫으로 차원의 틈을 열었는지 허공에서 고심하며 무언가를 뒤적거리다 꺼내 트리에 달고, 다시 뒤적거리다 트리에 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테일이 달고있던 것은 꽤 고급스러워보이는 장식물 들이었는데, 귀족이나 쓸 법한 고급 천의 리본이나, 금색의 병정 조각, 오색의 지팡이 조각 등, 이델이 잡화점에서 본 장식물보다 몇배는 비싸고 좋은 질의 것들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저런 걸.마지막으로 테일은 별모양 장식을 트리 꼭대기에 달려고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
"내가 달지."
"....시발, 내가 안닿아서 너한테 주는거 아니거든?? 이거 진짜 귀찮아서 너한테 맡기는거다?"
"......그래."

마지막으로 별을 달자, 트리는 콜헨 광장에 있던 그 것보다 훨씬 더 멋져보였다. 에르그 결정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반사해 장식들이 더욱 고급스러움을 뽐냈고, 종류도 다양해 나쁘지 않았다. 셋은 탁자에 마주앉아 트리를 잠시 구경하고는, 그제야 꽤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테일아, 근데 저 장식들 무지 이쁘다! 어디서 산거야???"
"사기는, 의뢰 가서 돈 대신 뜯어온거야. 귀족 새끼들은 하여간에 돈이 썩어 빠지니 얼만지도 몰라서는 저걸로 가져가겠다고 하니까 더 좋아하던데? 저거 다 팔면 의뢰비의 1.5배는 나올걸. 크으, 오랜만에 호구같은 의뢰인 한분 모셨네."
"1.5배?"
"몰라, 흥정 잘 하면 그정도 나올거고. 못해도 천은 나오지 싶어?"
'....지금 천만이 넘는 가격의 장식으로 트리를 꾸민건가.'
"근데 저 에르그 결정들은 뭐냐. 네가 붙여놓은거야?"
"응! 이쁘지!! 저거 폐허랑 얼음동굴이랑 가서 잔뜩 주워왔어!"
"전구 대용은 되겠네. 난 또, 돈 모아서 어디 가서 거지같은 장식이나 사올줄 알았더니. 나중에 결정 팔면 뭐, 트리값 반은 하겠는데."
"응? 결정들은 리엘 할아버지가 쓸데 있다고 하길래 나중에 싸게 팔겠다고 했는걸. 도움받은것도 있고!"
".....이 새끼는 진짜 호구인가."
"이델, 나 이거 더 먹을래!"
"스테이크? 부엌에 양을 나눠 잘라둔 게 있다. 굽는 방법은 아까 봤겠지."
"응!!"
"요리를 쟤한테 맡겨도 될... 아. 뭐. 쟤가 먹을거니 괜찮겠네."
"설마, 말 그대로 굽기만 하는거니. 이 고기들도 아리가 구운거고, 괜찮을거다."
"......."
"....이건 내가 옆에서 보고있었으니 아무 문제 없다. 아리는 불 조절만 했어. 그러니까 그런 의심스런 표정으로 보지마라."
"그.. 래...... 아니. 잠깐. 타는 냄새 나는데."
"-이데에에에에엘!!!"
"......"
"풉. 수고!"

이델은 황급히 부엌으로 뛰쳐들어갔다. 테일은 천천히 타티크 스테이크를 조금 잘라 그 맛을 음미하며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감상했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였다. 이런것도 나쁘진 않네. 테일은 건배하듯 물잔을 들어올려보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멍청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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